
현대 그랜저 XG는 유난히 "말이 적은 차"였다. 도로 위에서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디자인으로 시선을 붙잡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대신 이 차는 존재 자체로 상황을 정리했다. 주차장에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운전석에서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만으로도 “아, 이 정도면 됐지”라는 공기가 흘렀다. 그랜저 XG는 성공을 과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한 자동차였고,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각그랜저’ 이후의 질문,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그랜저라는 이름은 이미 무거운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각진 실루엣의 초기 그랜저는 ‘성공의 증표’로 통했고,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사회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성공은 더 이상 소리 내어 자랑할 대상이 아니었고, 중후함은 위압감보다는 여유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현대 자동차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그랜저의 상징성을 유지하되, 표현 방식은 완전히 새롭게 바꾸자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모델이 바로 그랜저 XG였다.
XG는 과거의 그랜저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 의미를 현재의 언어로 다시 썼다.
각을 버리고, 여유를 입히다 - 현대 그랜저 XG
그랜저 XG의 외관은 이전 세대와 분명히 달랐다. 각진 선 대신 부드러운 곡선을 택했고, 공격적인 인상보다 안정적인 비례를 우선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디자인 트렌드의 반영이 아니었다.
XG의 디자인은 “이제는 이렇게 보여도 된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성공은 더 이상 날카로울 필요가 없고, 크기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 이 차는 그 태도를 차체 전체에 고요하게 담아냈다.
그래서 그랜저 XG는 멀리서 보면 튀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면 단정하고 정제되어 있다. 오래 볼수록 신뢰가 쌓이는 얼굴이었다.
문을 닫는 순간 느껴지는 ‘정리된 세계’
그랜저 XG의 진짜 매력은 실내에서 드러난다. 문을 닫는 순간, 외부의 소음이 한 겹 걸러지고 공간이 정리된다. 이 감각은 단순한 방음 성능을 넘어선다.
실내는 과하지 않게 넓었고, 좌석은 몸을 편안하게 받쳐줬다. 장시간 운전에서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고, 동승자 역시 불필요한 긴장을 느끼지 않았다.
이 차는 “편하다”는 말을 쉽게 꺼내게 만든다. 그리고 이 편안함은, 운전자에게 자신감이 아니라 "여유"를 남겼다.
운전을 과시에서 책임으로 바꾸다
그랜저 XG를 운전하는 감각은 흥미롭다. 빠르게 달리도록 유혹하지 않고, 조급함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대신 차분하다.
엑셀을 밟으면 부드럽게 반응하고, 고속도로에서는 차체가 안정적으로 눌러앉는다. 이 차는 운전자를 시험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해낸 사람에게 더 이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태도다.
그래서 그랜저 XG는 운전을 ‘즐기는 행위’라기보다, ‘정리된 이동’으로 느끼게 한다. 회의에 가는 길, 가족을 태우는 길, 하루를 마무리하는 귀가길까지—모든 상황에서 과하지 않았다.
‘사장님 차’라는 표현의 변화, 성공의 얼굴을 조용히 바꾸다
그랜저 XG 이후, ‘사장님 차’라는 표현의 결도 달라졌다. 이전의 사장님 차가 위압과 상징을 담고 있었다면, XG 이후의 사장님 차는 안정과 신뢰를 담기 시작했다.
이 차를 타는 사람은 굳이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자동차가 대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급하지 않다”, “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랜저 XG는 그런 메시지를 가장 조용하게 전달한 차였다.
현대자동차가 도달한 하나의 목표
그랜저 XG는 현대자동차에게도 중요한 이정표였다. 이 차를 통해 현대는 ‘국산 대형 세단의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등장하는 여러 고급 세단들의 방향성—정숙함, 여유, 절제된 디자인—은 모두 XG가 남긴 경험 위에서 자라났다.
그랜저 XG는 단기적인 유행이 아니라, 기준을 만든 차였다.
시간이 지나 더 단단해지는 평가
오늘날 그랜저 XG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하다. “무난했지만, 참 괜찮았다.” 이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동차는 시간이 지나면 장점보다 단점이 먼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XG는 반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는 참 안정적이었지”라는 기억이 남는다.
그래서 현대 그랜저 XG는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성공을 가장 차분하게 표현한 차’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 자동차는 소리 없이 기준을 바꿨고, 그 조용함 덕분에 더 오래 남았다.